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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겨레프리즘] 권리를 위한 투쟁 / 고명섭

[한겨레프리즘] 권리를 위한 투쟁 / 고명섭

 

» 고명섭 책·지성팀장

법사회학의 아버지 루돌프 폰 예링(1818~1892)은 1868년부터 4년 남짓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의 강의는 어찌나 인기가 높았던지 매번 수백명이 몰려들었고, 수강생 중 한 사람이었던 러시아 황태자는 예링을 가리켜 “인류에게 법학의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라고 일컫기도 했다. 1872년 대학을 떠날 때 예링이 했던 고별강연이 저 유명한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1년여의 법정투쟁 끝에 해임 무효 판결을 받고 다시 해임 효력 정지 결정을 끌어내 출근투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링의 강연문은 14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꼭 대한민국의 오늘을 눈앞에 두고 낭독하는 선언문처럼 읽힌다.

예링은 법학자답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지만, 그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다. 법은 들판의 식물처럼 아무런 고통도 노력도 없이 저절로 꽃피지 않는다. 정의의 여신이 왜 한 손에 저울을, 다른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가. 칼이 없는 저울은 무력하기 때문이다. 법의 생명은 투쟁이다. 예링의 모토는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신은 투쟁하는 가운데 스스로 권리를 찾아야 한다.” 권리를 지키는 일은 단순히 이해관계를 다투어 내 몫을 챙기는 일이 아니다. 권리를 지키는 것은 모욕당한 인격을 되찾는 일이며, 공동체 전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자신의 권리가 불법적으로 침해당하고 있는데도 권리 위에 잠잘 경우, 자신의 권리만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상황에 처한 이웃의 권리까지 침해당한다. 그러므로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만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예링의 권리투쟁은 숭고한 공동체적 사명이 된다.

 

일본의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는 예링의 명제,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한다”를 헌법의 차원에서 숙고해 좀 더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기도 했다. “국민은 주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권자라는 사실에 안주해 그 권리의 행사를 게을리 하면, 어느 날 아침 깨어나 보니 이미 주권자가 아니게 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마루야마는 말한다. “자유를 축복하는 것은 쉽다. 거기에 비해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자유를 시민이 매일매일 행사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민주주의는 ‘자유의 실천’, ‘주권의 실천’을 통해서만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된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민주주의적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자유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끊임없는 ‘민주주의 실천’을 통해서 간신히 민주주의일 수 있다.

 

김정헌 위원장이 법정투쟁을 통해 해임 무효 판결을 이끌어내고 다시 행정소송을 벌여 해임 효력 정지 결정을 받아낸 것은 개인의 권익을 넘어 공동체의 권익을 지키는 ‘권리투쟁’의 사례이자 ‘민주주의 실천’의 생생한 본보기라 할 만하다. 김 위원장은 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이 자신의 출근을 막고 사태의 원인을 김 위원장에게 돌리자 “왜 그렇게 깡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라고 나무랐는데, 여기서 말한 ‘깡’이야말로 예링이 강조한 ‘불법에 대한 투쟁 정신’일 것이다. 예링은 자신의 강연문을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빌려온 문장으로 맺었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쟁취하는 자만이 향유한다.” 싸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024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