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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아이들에게 노무현 위인전을 사줄 수 있게 되기를…

내 아이들에게 노무현 위인전을 사줄 수 있게 되기를…
(한겨레 신문 독자 마당 / 무현아빠 / 2002-12-26)


1984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부산 당감동 성당에서 송기인 신부님이 학생 미사에서 강론을 하셨다. 오래된 일이라 세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영국(?)에 어떤 신부님이 계셨다. 이분은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셨다. 너무 열심히, 진심으로 일하셨지만, 행사는 중도에 실패하고, 담당하는 성당이나 교구는 언제나 그 신자 수가 줄었다. 어디서나 실패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눈 오는 길에서 객사를 하고야 만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람을 가리켜 실패자라고 했습니다. 무능하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가치 기준입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른 평가입니다. 크리스챤의 평가는 다릅니다. 세상과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평생을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가진바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항상 실패와 좌절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요, 진정으로 성공한 크리스챤입니다."

대충 이와 같은 말로 신부님께서는 강론을 마치셨다. 나와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다. 크리스챤의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다. 헌금의 액수나 신도의 숫자는 세상의 가치기준일 뿐이다. 절에 신도가 많고 시주가 많이 들어온다고 스님들이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1988년 제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동구에 출마한 노무현의 선거포스터

여기에 두 가지 가치가 있"었"다. 정치가로서 성공하는 가치와, 진정 국민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가치이다. 정치가로서 성공하는 가치로 평가할 때, 대선 전까지 노무현은 철저한 패배자였다. 그는 그 쉬운 길을 항상 외면하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후자의 가치를 지키고 키워왔다. 그는 대선 전까지 실패자였다. 그 실패는 마침내 정당한 가치관을 가진 자들에 의해 제자리를 찾았다.

이번 선거가 진정으로 가치롭고 빛나는 이유는, "진정 국민을 사랑하고 인간다움을 지키는 가치"가 정치적 성공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음지와 양지의 가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자신의 삶 앞에 성실한 사람은 결국은 성공할 수 있다는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의 진리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잣대로 인생을 혼란에 빠트렸는가? 거의 한 세기가 다 가도록 우리는 불의가 득세하고 반역이 대접받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친일파가, 한민당이, 공화당이, 민정당이, 민자당이, 그리고 딴나라당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아이에게 바르게 살자고 가르치자니, 이 아이는 항상 손해만 보고 어리석게 세상을 살 것만 같다. 그렇다고 도덕적 신념과 양심에 배치되는, 성공하는 길을 가르치기도 싫다. 그 아이러니의 극치가 "이경규가 간다"라는 TV 프로그램이었다.

사회가 얼마나 거꾸로 돌아가면 당연한 일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 하나를 밤새워 찾아서 상을 주고 난리 법석을 벌여야 하는가? 이웃 나라에서는 제대로 안 지키는 사람 하나 찾기가 어려운데!!! 유감스럽게도 이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본말이 전도되고 가치가 나락에 빠진 사회의 모습이다. 그 수렁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우리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런 사회에서 살아야 할지 누구도 아직은 모른다. 그렇게 고착된 병든 정서와 가치관이 얼마나 완고하고 때론 거칠게, 때론 교묘하게 저항할지 두렵기만 하다. 어느 한 사람이, 어느 하나의 돌개바람이 한 번에 이들을 쓸어 낼 수 있을까? 적어도 내 생각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는 그러한 모순이 시정된 사회에서 살고 싶다.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대접을 받고, 자신의 정치적 잇속이 아니라 진정으로 유권자를 위해서 일한 사람들이 선거에서 이기는 사회. 국민을 기만하며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 확대하려는 사기 언론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언론이 최고의 부수를 기록하는 사회. 열심히 공부한 사람만큼 열심히 노동을 한 사람도 그만큼의 사회적 기여도로 대접을 받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좋은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놈들은 벌을 받고야 마는 사회!!! 우리는 이러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한다.

2002년 노무현 대선광고 '눈물' 의 한 장면. 

노무현 후보의 눈물을 보았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에 도전한, 세상의 가치에 등을 돌린 자의 패배의 눈물이었다. 또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온, 양심과 소신이라는 가치를 키워온 자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기도 했다. 아직 그는 승리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멀고 험난한 장정에서의 첫 승리를 거두었다. 커다란 승리지만, 아직은 너무도 미약한 승리이다.

앞으로 닥쳐올 그 완고하고 두터운 기득권의 저항은 그에게 끝없이 눈물을 강요할 것이고, 쉬운 샛길을 펼쳐보이며 유혹할 것이다. 타협하라, 네가 무슨 독불장군이냐? 세상은 다 그런 것이다. 네 혼자 아무리 힘쓴다고 해도 그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결국, 너의 한계만 확인하고 실패한 대통령이 될 것이냐?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노무현 당선자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서 국민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할 수 있기를. 그러나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유세장에서 보였던 그 눈물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다. 언제든 그러한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의 전도된 가치의 기준으로는 언제든지 기꺼이 패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소중히 여기며 가슴 깊이 간직하는 가치만은 한 조각 심장이 남아 있는 한 끝끝내 지켰으면 한다. 그게 설령 5년의 임기 동안 빛을 보지 못할지라도, 그 때문에 정치적으로 매장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중도에 퇴임하게 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래서, 그가 못다 한 회한을 씹으며 분루를 삼키며 퇴장할 때, 우리 또한 분루를 삼키며, 다음엔 기필코 승리하리라 핏발선 눈으로 함께 결의를 다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유능한 대통령이길 바란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가 믿은 인간이 끝끝내 그 믿음만은 저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아이들이 자랐을 때, 내가 손수 뽑은 대통령의 전기를 "위인전기"라고 사 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딸 민주와 사랑하는 아들 무현이를 생각하며…

 

(cL) 무현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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