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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담벼락에 욕이라도 / 정재권

[편집국에서] 담벼락에 욕이라도 / 정재권
한겨레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2009년 마지막 날, 한 해를 정리하며 새삼 곱씹어지는 말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6월 말 한 오찬장에서 이 말을 했다. 헌데 점잖지 못하게 담벼락에 욕이라도, 라니?

그의 말의 앞뒤를 이어보자.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말고,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집회에 나가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김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6월11일 ‘남북 공동선언’ 9돌 기념식 강연에서 한 말과 연결해보면 의미가 한층 명확해진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惡)의 편이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지 말자.”

김 전 대통령은 7월 병원에 입원한 뒤 끝내 일어서지 못했으니, 이 말들은 그가 세상에 남긴 유지나 다름없다.

그렇다. 문제는 ‘행동’이다. 한국 사회에 횡행하는 ‘야만’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이냐다.

올 한 해 우리가 체험한 것은 참담함이다. 4대강 사업 밀어붙이기,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 손바닥 뒤집듯 한 세종시 궤도 수정 등 이성과 상식이 하나둘 무너지는데 그 앞에서 초라하고 무기력했다. 급기야 해의 끝자락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군사작전이라도 하듯 비밀스럽게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을 특별사면하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다. 법치주의 정신은 통치 앞에서 너무도 허망하게 무릎을 꿇었다. 오늘은 내년도 예산안을 놓고 국회에서 ‘힘’의 논리가 판치는 상황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만 향하고, 절망과 낙담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나를, 주변을, 세상을 바꾸는 단초가 되는 길들은 많다. 12월29일 서울시민 10만2741명은 서울광장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달라는 조례개정 청구인 명부를 서울시에 냈다. ‘닫힌 광장’을 ‘열린 광장’으로 되찾자며 지난 7월 조례개정 청구운동이 시작됐을 때 다들 가능성을 반신반의했지만, 거뜬하게 유효 청구인 수 8만5000명을 넘겼다. 나의 작은 참여가 변화의 출발점이라는, 나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많은 이들이 함께 간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한겨레>가 시민단체인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청구센터’와 11~12월 두달 동안 진행한 공공기관 정보공개청구 캠페인에도 수백건의 정보공개 청구 결과들이 몰리고 있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공인노무사, 주부, 변호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알권리를 위해 공공기관에 궁금한 정보들을 물었다. 새해 1월 그 결과가 공개되겠지만, 벌써부터 그 내용들이 궁금해진다.

1년을 끌어오며 시대적 비극의 상징이 된 ‘용산’이 30일 어렵사리 합의점을 찾은 것도 진실과 정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흘린 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또 없을까. 얼마든지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말마따나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않고,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집회에 나가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하다못해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면 된다.

특히나 2010년은 지방선거의 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만큼은 아닐지라도, 시대의 야만에 맞설 수 있는 자리가 열린다. ‘그동안 투표했지만 그게 그거였잖아. 나 하나 제대로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불신을 ‘나부터 투표해야 세상이 달라진다’는 믿음으로 바꾸자. 나와 이웃의 힘을 믿자.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에 있는 법. 절망의 2009년을 보내고 가슴 꽉 찬 희망으로 2010년을 맞는다.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