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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What ought I to do?)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What ought I to do?)
무지(無知)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무책임한 사회에서…

(서프라이즈 / 엘파소 별 / 2009-11-13)


우리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알고 있다. 사람이 그렇다. 알지 못하는 일로 겁을 낼 리 없고 부끄러워할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좌충우돌하다 크게 당하고 난 뒤 비로소 깨닫게 되는데 이렇게 깨달음의 정보를 축적하여 앎으로 인도하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이란 바르게 앎으로 가는 능력을 개발하는 일이다. 경제든,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모두가 이치를 깨달음이고 이해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깨달음을 지식의 창고에 묵히지 않고 삶의 현장에 응용하여 바르게 삶을 지혜라고 말한다. 따라서 배우고 깨달음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많이 배울수록 부끄러움을 많이 느낀다. 부끄러움을 알 때 사람이 되지만 부끄러움을 모를수록 짐승처럼 되어 간다.

우리가 염치나 체면 또는 양심이라는 말을 쓸 때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아는 척도로 이해한다. 이것은 인간을 물리적 존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도덕적이라는 말이나 윤리적이라는 말을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추상적 이해의 방법이다. 그 추상적 가치가 여러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구현될 때 우리는 책임적 존재로 이해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이…’ 또는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인간이 되어야지” 라고 말하곤 한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추상적이며 책임적인 인간존재를 뜻한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궁극적인 세 가지 질문을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What ought I to do?)이다. 이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도덕적 물음이다. 인간이 도덕적이려면 자신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따라서 한 사회공동체는 이 도덕적 가치의 기준과 범위 등을 만들어갈 때 이루어진다.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지의 기준이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말해준다. 모든 교육은 이 범위를 벗어나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에서 자신이 해야 할, 사회적 합의로 도덕적 가치로 형성된 기준들을 따라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무책임’이라고 말을 한다. 법률적으로 정해 놓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범죄로 보고 사회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합의된 벌을 가하게 된다. 이를 법치적 도덕률이라 하겠다. 법을 어기고 감옥에 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법률 밖에서도, 예를 들면 한 가장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외면하고 도박을 하거나 알콜에 취하여 가족의 필요를 전혀 채워주지 못한다면 법률적으로는 죄인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을 정죄하는 판단으로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도덕적 가치판단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숙한 인간의 기준으로 법률적 책임뿐만 아니라 도덕적 책임까지 말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은 이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영혼 없는 지식기계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이며 책임적 존재로 가는 길이다. 무지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앎을 추구하여 무지몽매함으로부터 해방되는 인간존재로 태어남이 홍익인간이 되는 길이 아닌가.

지금 한국사회는 세계에 보기 드문 고학력사회다. 매년 수능시험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일 년 내내 교육 문제로 소동이 그치질 않는 나라다. 우리는 그 들끓는 교육열에 힘입어 세계 속에 경제대국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다. 그러나 과연 영혼 없는 기술기계만 양산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을 키우는 일에는 실패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억울하게, 집요하게, 무식한 권력의 폭력으로 입은 허물로 인해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고 자결한 노 전 대통령으로 거북함을 느낀 권력집단이 내세운 얼굴마담 정운찬 총리를 지켜보며 그가 이명박 이상으로 한국사회의 병든 자화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편견이 아니다. 앞서 말한, 교육, 인간의 추상적 의미, 도덕적, 책임적 인간 등 그 어떤 단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서울대학은 한국의 교육을 이끈다. 아니 한국사회 전체를 이끈다. 어디로 이끌고 있을까? 이명박 정부의 지금이 그 현주소다. 이명박 정부의 총리 정운찬은 서울대학의 총장이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정운찬은 한국 교육이 얼마나 교육의 길을 벗어났는지를 정직히 보여주고 있다. 정운찬 같은, 지식기계와 같은 로버트 인간이 얼마나 많을까? 한국사회를 온통 뒤덮고 있지 않은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국민, 박정희가 일본제국에 충성하려 혈서까지 썼다는 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 일본의 강점과 착취의 역사를 찬양하는 일을 당당히 여기는 세상, 총리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731부대를 ‘항일독립군’으로 알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무책임한 사회가 지금의 한국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죽어야 하고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짐승들이 활개 하는 세상은 야만이다. 고학력의 위선 아래 무식함을 감추어도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이 무식함은 이제 ‘스와인 플루’처럼 전 국민에게로 전이되고 있음은 비극이다.

무지(無知)로부터 눈을 뜬 이와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의 책임이 더 무거워진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What ought I to do?)


(cL) 엘파소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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