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권재혁을 아십니까 / 한홍구 | |
11월4일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당한 진보적 경제학자 권재혁의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11월6일에는 학사주점 사건의 이문규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린 탈북자 이수근도 권재혁보다 꼭 넉 달 전인 7월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권재혁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인 11월3일에는 이른바 유럽간첩단 사건으로 김규남 의원과 역시 진보적인 경제학자였던 박노수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 김규남의 사형은 1972년 7월13일, 박노수의 사형은 7월30일 각각 집행되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의 야욕을 불태운 1969년에는 유달리 간첩 사건도 많았고, 억울한 사형 집행도, 사형 선고도 많았다. 국회에서 날치기로 3선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국민투표까지의 한 달 동안만 해도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3건의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수근의 위장귀순 사건도, 권재혁의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도, 김규남, 박노수의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도 모두 중앙정보부가 조작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가 잘 아는 1975년의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독재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사형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송씨 일가 간첩 사건이나, 여러 지역의 납북어부 간첩 사건들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은 뒤늦게나마 무죄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래도 여기 거론된 분들은 억울함이라도 밝혀진 분들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170여명, 전두환 정권하에서 10명가량이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사형을 당했다. 과거사위원회가 미처 조사하지 못한 사건들 중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은 또 얼마일까? 60년대의 희생자들은 그래도 해외 유학도 하고, 나름 인맥도 있고, 또 민주화 운동이라도 했던 분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작간첩 사건의 희생자들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억울한 소시민들 속에서 나왔다. 국선변호인조차 귀 기울여 주지 않아 혼자서 맞춤법도 맞지 않는 탄원서 한 장 남겨놓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증거도 없었던 사람들 …. 이 땅의 40대 이상은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975년 인혁당 사건의 하재완이 사형당했을 때 그의 막내는 4살이었다. 잘해야 여덟, 아홉 살 먹었을 동네 형아들은 4살짜리 꼬마를 빨갱이 새끼라고 새끼줄로 나무에 묶어놓고 사형시키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 형아들은 무슨 죄인가?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간첩 사건 발표 날 때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저런 것들은 잡아 죽여야 한다고 박수 치지 않았던가? 마침 그 골목에 살지 않았을 뿐, 그 암울한 시절을 산 사람들은 모두 새끼줄 한 자락을 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간첩이 아니란다. 그나마 간첩 조작의 억울함을 밝혀주던 과거사위원회는 곧 문을 닫는단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쪽 당국이 적발한 간첩 1천여명 중 진짜 북에서 남파시킨 간첩은 단언컨대 50명이 안 된다. 나머지 모두를 조작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억울하고 또 억울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다. 그렇게 수많은 조작 간첩이 있건만 간첩 조작의 지난 죄를 고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파이를 서로 교환하는 외국의 사례가 부러울 뿐이다. 정보부 지하실에 잡혀 와서야 자신이 ‘수괴’라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의 이름을 처음 듣고, 죽은 뒤에도 전략당 사건의 권재혁이라 불려야 하는 젊은 경제학자의 40주기에 술 한잔을 올린다. 술 한잔이라도 올려야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녕 그것뿐일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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