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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통령의 ‘거짓말’ / 김이택

[편집국에서] 대통령의 ‘거짓말’ / 김이택
한겨레 김이택 기자
» 김이택 수석부국장
행정도시 수정론이 공론화된 건 꼭 한달 전, 정운찬 총리 후보의 입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미 올 초부터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정권 핵심부에선 그런 기류가 있었던 것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올 2월 미국에서 열린 세종시투자설명회에 갑자기 주최측 대표인 국토해양부 장관이 참석을 취소하고 행정도시 관련 일정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행정도시 대신 서울공대·대기업 등을 유치해 과학비즈니스 벨트로 만드는 방안이 4월에 이미 마련됐다는 게 여권 핵심인사의 전언이다. 서울대 공대 학장은 ‘세종우주과학도시’를 세우기로 하고 여기에 서울공대 제2캠퍼스를 짓는 문제를 놓고 정부와 상의까지 했다고 한 월간지에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딴청을 부렸다. 6월 청와대에서 박희태, 이회창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도 행정도시를 “계획대로 추진중”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공약도 못 지키는 경우가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 약속을 뒤집었고, 김영삼 대통령은 공약은 아니지만 3당 합당 때 약속한 내각제 이면합의를 파기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민련과의 내각제 합의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약속을 깨더라도 국민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중간평가 포기는 야당과 합의를 거쳤고, 내각제는 국민적 지지가 모자라 추동력 자체가 부족했다. 이에 비하면 행정도시는 여야 합의 아래 법까지 만들었고, 보상금 지급에 이어 이미 땅이 파헤쳐진 상황이다. 이 대통령 스스로도 대선을 치르면서 “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거나 “계획대로 추진할 것”이라고 자기 입으로 여러 차례 ‘못질’을 해놓은 터였다.

자족기능 부족과 비효율성이 걱정됐다면 임기 초부터 솔직하게 털어놓고 공론화를 거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비겁한 방식을 택했다. 지지도가 신통찮을 때는 잠자코 있더니, 조금 회복되자 충청 출신 총리 후보를 바람잡이로 내세웠다. 자기는 뒤로 빠지고, 측근들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기자들의 질문까지 틀어막았다. 그러다 행정도시에 대한 여론 기류가 바뀌는 듯하자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에는 적당한 타협이 있어선 안 된다”며 슬쩍 속내를 비쳤다.

‘불충스럽게도’ 이 말을 들으면서 “내가 비비케이란 회사를 만들었다”는 비비케이 동영상이 떠올랐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했듯이 행정도시 약속도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고 봐야 한다. ‘백년대계’ 발언 이후 들려오는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더욱 그렇다.

이 대통령의 말 따로 행동 따로 행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운하를 포기한다고 약속해놓고는 사실상 대운하 준비 단계인 4대강 개발로 이름만 살짝 바꿔 밀어붙이고 있다. “요즘 어떻게 언론을 장악하느냐”고 말하면서, 뒤로는 정연주 사장을 내쫓고 윤도현·신경민·김제동·손석희씨가 줄줄이 잘려나가도록 했다. 말끝마다 ‘법치’를 내세우면서도 위장전입 등 법 위반투성이의 총리, 장관 후보들은 하나도 낙마시키지 않고 그대로 기용했다. “대기업 간부를 오라 가라 하는 발상은 안 된다”고 말해놓고 250억원 모금에 관여한 청와대 행정관은 아무 징계도 않고 부처로 되돌려보내는 선에서 끝냈다.

매사 이런 식인데도 잘나가는 이유는 박정희·전두환 이후 최고의 권·언유착 황금기로 평가되는 우호적인 언론 환경 덕이 크다. 오죽하면 <중앙일보>에까지 언론의 ‘감시견 역할’ 실종을 우려하는 칼럼이 실렸겠는가. 종합편성채널이란 큼지막한 선물 앞에서 보수언론들은 이미 대통령이 행정도시 포기 선언만 하면 ‘나라를 위한 결단’으로 미화하려 지면 곳곳에 한자락을 깔아놓고 준비를 단단히 해놓고 있다. 이들이 박근혜 암초를 어떻게 손잡고 헤쳐나가는지 지켜보자.

김이택 수석부국장ri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