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무를 꽉 물어버린 개
[한명숙 전 총리 2차 공판 참관기] 핵심증인의 고백, 뒤통수 맞은 검찰
(노무현재단 / 강기석 / 2010-12-21)
도둑놈들, 사기꾼들, 깡패들이 설치고 돌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감투까지 눌러쓰고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험한 세상이다. 평범한 사람이 크게 욕심내지 않고 상식을 지키며 착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사람이라 칭송받는 이유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나쁜 마음을 먹고 착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음모에 적극 가담했으되, 결정적인 순간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침으로써 진실을 바로 잡은 사람에게는 어떤 대접이 어울릴까. 상황을 원상회복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므로 ‘돌아온 탕자’에게 어울림 직한 너그러움으로 감싸 안는 정도로 적당한 것인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이익을 각오하고 착한 사람에게 들씌워진 누명을 벗겼을 뿐 아니라, 나쁜 자들의 흉악한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부친의 엄한 질책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벚나무를 자른 사실을 거짓 없이 고백한 조지 워싱턴의 용기를 영웅의 한 면모라고 배운 예에 따라 이 사람의 용기를 좀 더 치켜세운들 큰 무리는 없지 않겠는가.
‘돌아온 탕자’가 보여준 영웅의 용기
검찰에 따르면, ‘한명숙 총리에 대한 검찰 독직사건 2’로 명명해야 마땅한 이 재판에서 H 건영 한 모 전 사장은 한 번에 3억씩 3번, 도합 9억 원의 불법정치자금을 자신이 직접 한 총리에게 공여한, 이번 사건의 알파요 오메가격인 핵심증인이다.
20일 2차 공판의 유일한 증인으로 법정에 선 이 사람에게 검찰은 처음부터 자신만만하게, 부친을 통해 한 총리를 알게 된 경위, 사무실을 시가보다 싸게 임대해 준 경위, 한씨 종친회에 대한 후원 여부 등을 물어가며 본격적인 신문을 위해 숨을 골랐다. 한껏 여유를 부리던 검찰이 드디어 3번에 걸쳐 3억 원씩 정치자금을 공여한 상황에 대해 본격적인 첫 질문을 던지는 순간, 한 사장은 이 대목에서 할 말이 있다며 증인석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는 한명숙 전 총리님께 돈을 준 적이 없습니다. 한 총리님은 지금 누명을 쓰고 계신 것입니다.”
법정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방청석에서는 박수소리와 함께, 법정정리의 제지에도 검찰을 질타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증인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말없이 증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한 총리는 그 순간 오히려 긴장의 맥이 풀린 듯 더욱 창백해진 안색으로 의자에 깊숙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눈물을 훔쳤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기명 전 노무현후원회장 등도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아냈다. 한 총리와 함께 피고인으로 앉아 있던 김모씨는 아예 정신을 놓은 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안도의 충격이 너무 급격히 닥쳐온 것이다.
혼비백산한 검사들은 돈을 전달한 구체적인 장소, 방법 등에 대해 준비된 질문을 계속하려 했으나 한 사장은 검찰이 제시한 장소는 자신이 익숙하게 아는 장소들을 꾸며댄 것이므로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돈을 줬다는 진술 자체가 애초부터 허위였으므로 그런 것(허위진술)을 근거로 질문하면 답변할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검찰이 지속적으로 던진 “검찰에서 그렇게 진술하지 않았느냐”는 신문에 대해서도 “검찰에서 그렇게 진술한 것은 맞지만 그런(돈을 준) 일 자체는 없다”는 사실을 거듭 분명히 했다.
73번이나 불러 조지고도 뒤통수 맞은 검찰
그건 이미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신문이 아니라 책임회피에 급급한 초라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검찰은 한 사장이 검찰에서 한 허위진술이 결코 강압적이거나 유도신문에 의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것은 일정 부분 한 사장도 인정했지만 과연 100% 진실이 그랬을까.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인들이 스스로의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만큼 입에 잘 올리는 말이 있다고 한다. “검사는 (수사하려고) 불러 조지고, 판사는 (판결을) 때려 조지고, 집에서는 (재산을) 팔아 조진다.”
그만큼 검사가 불러대는 것이 괴롭다는 얘긴데 이번 사건에서 검찰은 수사기간 동안 한 전 사장을 무려 73번이나 불러 조졌다고 한다! 이틀에 한 번씩, 사흘에 한 번씩 불러서, 한 얘기 하고 또 하고, 한 얘기 하고 또 하면, 없는 귀신도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전 사장은 수사과정에서 이미 진실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결정한 후에도 계속 검찰에 협조한 이유에 대해 “검찰이 너무 잘해준 데다가 너무 열성적이어서 차마 거부하기 어려웠다”고 했는데 이는 역으로 검찰이 얼마나 사리분별을 잃고 오로지 한 전 총리 옭아 넣기에 일로매진했는가를 웅변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한 전 사장이 당초 한 전 총리를 겨냥한 음모극에 가담하고자 결심했던 배경에는 그의 잘못된 계산도 작용했던 듯하다. 그의 증언을 분석하건대, 어떡하든 한 총리를 잡으려는 검찰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그 음모에 충실히 봉사함으로써 검찰의 힘을 빌려 자신이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돈은 물론,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회사까지 되찾을 수 있다고 착각한 것 같다.
‘서울시장 선거’까지 들먹이는 상황에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불이익이 발생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 뒤늦게 마음을 바꿨을까.
뒤늦은 고백에 이르기까지 그 고뇌의 무게가 무겁다
“한 총리님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었고 (한 총리님을 아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허위진술로 인해 한 총리님이 서울시장에서 낙선하고 또 기소까지 당하여 고통받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건강이 나쁘기도 했지만 죄책감이 밀려들어 심지어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고 이대로 내가 삶을 마쳐버리면 한 총리님 의혹을 벗겨 드리기 어렵기 때문에 재판이 열리는 오늘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수개월 전 수사과정에서 이미 진술번복을 결심했으면서도 이날 법정에까지 오게 된 진짜 이유를 밝혔다.
“검찰(단계)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세간에서는 의혹이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검찰이 어떻게든 엮을 것이라는 뉘앙스) 법정에서 밝혀야만 한 총리님의 누명이나 억울한 것이 벗겨질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 혹자는 이 사람이 당초 기대했던 혜택을 누리지 못할 것이 분명하게 되자 변심한 것일 뿐이라고 혹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날 법정에서 고백했듯, 검찰에 대해 느끼고 있는 어마어마한 중압감, 이 음모를 둘러싸고 있는(이날 검찰이 예정에도 없던 대질신문을 해야 한다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 인물들에 대한 공포감을 고려한다면, 이 사람이 결국 진실의 편에 서고자 결심하기까지의 고뇌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사나운 개를 길들이는 방법 중에, 아주 뜨겁게 익힌 무를 던져(뜨거운지 여부를 알 수 없는 개가) 덥석 물게 함으로써 이빨을 몽땅 뽑는 방법이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우스갯소리가 있다. 원래 성질 급하고 사나운 것들은 이성이나 논리로 설득하기는 어렵고 뭔가 비상한 꼴을 스스로 당해 봐야 비로소 안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인데 아무래도 검찰이 이번에도 그 꼴이 난 것 같다.
강기석 /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편집위원장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2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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