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고
노무현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왜 그런 극명한 호불호의 차이를 가져왔고 그런 대단한 ‘소동’을 일으켰는가를 생각했다. 굳이 소동이라고 쓴 이유는 성공이라던가 실패라던가 하는 평가를 피한 것이다. 한국에서 그에 대한 찬반을 떠나 노무현이 일으킨 ‘소동’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소동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시대의 어떤 점을 정확히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찔렀다는 이야기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나의 생각은 자서전을 읽으며 더욱 깊어진다. 먼저 그는 김대중 대통령처럼 오랫동안 정치계의 거두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보다 그는 시대가 뽑아 올린 사람이라는 것에 가깝다. 벼락출세한 사람이랄까. 물론 그는 그 나름대로 많은 고생을 했고 노력을 했지만 반세기 한국정치사에 노무현처럼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사라진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세력도 없고, 재력도, 인맥도 없다. 한해에 60명밖에 합격자가 안 나던 시대에 고졸로 사법고시에 합격한다는 기적을 이뤄냈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그가 이룬 정치적 성공을 재현할 수 있는 인물은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청문회 스타가 된다거나, 한 번의 선거에 이긴다거나, 무슨 바람을 타고 한번 떴다가 가라앉은 인물은 많다. 박찬종도 있고 정몽준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거듭해서 만들어 낸 사람은 노무현이 유일하며 이것은 그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님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우연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노무현이 누구인가는 끝없이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정치가로서 그의 출발점이 그를 가장 잘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권변호사였다. 그는 부림사건으로 죄없이 두들겨 맞고 구금당한 사람들을 보고 분노해서 사회 개혁이라는 길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도 그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아픔을 줄이는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부림사건이 30대 중반을 너머서 있었던 일이니 그의 사회참여는 40이 다돼서야 본격화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이후로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는 개인의 권리를 소중히 생각하는 인본주의자다. 여기서 그의 인본주의가 이론 이전에 정착되었다는 점이 내게는 중요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는 운동에 뛰어들면서 여러 가지 사회과학서적을 읽었지만 40살에 읽는 사회과학서적과 20살에 읽는 사회과학서적은 같을 수가 없다. 후자의 경우는 입시시절 사회경험이 적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상을 보는 틀을 얻어다가 세상을 보는 것이고 전자는 이미 자신이 파악한 세상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이론들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다. 해방 이후 내가 존경하는 두 분의 대통령은 노무현, 김대중으로 모두 고졸인데 나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적어도 한국의 지식 흐름은 주체가 없고 자기가 없다. 그러니 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대학에 가서 세계 석학들의 책에 파묻힐 때 그들은 그 안에서 길을 잃고 독립적인 생각을 하는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대학에 안 갔었다고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에 진정으로 뛰어난 인물이 되자면 대학을 대충 다니거나 안 다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진짜 대학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그러했듯 책 읽고 사색하는 감옥이 아니었을까. 노무현의 이런 점을 지적하는 것은 단지 대학교육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왜 시대와 불화하는가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다 안 보이는 것이 내 눈에만 보인다면 나는 아마도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특히 우리 사회 기득권자들의 눈에는 보이지가 않았다. 노무현의 반대자들에게 노무현은 ‘미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두고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작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에 천하가 울리는 탄핵사건 같은 일이 일어난다. 자기 정당에 대한 지지발언을 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적당히 사과하고 물러설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탄핵을 했던 사람들조차 처음에는 일이 그렇게 커지리라고 생각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무현의 반대자들은 항상 노무현이 귀신같은 술수를 부려 자신들을 속인다고 생각하곤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는 오목을 둔다고 생각했는데 게임이 바둑이 돼버린 꼴이다. 심지어 그의 죽음조차도 그렇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 중에는 그의 죽음조차 노무현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항상 그들이 생각하는 현 국면에서의 가능한 카드는 이거 아니면 저건데 노무현은 그들이 생각하지 않은 엉뚱한 것을 꺼내서 그들을 당혹하게 해왔다. 과연 이런 오해,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다시 노무현으로 돌아가서 노무현이 누구인가를 보자. 노무현을 사회적으로 노무현이게 한 사건, 그가 스스로 벌레가 사람이 된 사건이며 대통령이 되었을 때보다 감동적인 사건이라고 말한 사건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사법고시 합격이다. 시골마을 토담집에서 누구한테 배우는 것도 없이 책만 가지고 공부해서 이뤄낸 결과이며 잡역부로 일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지 4년 만에 있었던 일이다. 노무현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치고 노무현을 모난 사람으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사람은 좋다라는 말은 그를 비판하는 민노당 사람들도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원하지 않아서 혼자였지만 그리고 나중에는 대통령으로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지지도 받았지만 그는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갔다. 내가 보기에 그는 개인으로서 홀로 서는 것을 중요시하는 진정한 개인주의자다. 흔히 개인주의라는 것이 이기주의로 이해되지만 개인주의라는 것은 본래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나로 나의 정체성을 삼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스스로 홀로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나의 정체성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주의자들은 남에게 손 벌리기도 싫어하고 남에게 피해 끼치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원칙과 가치로,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한다. 한번은 유시민이 불평을 한 적도 있다. 노무현은 틈틈이 자기를 불러서 이것저것 묻지만 주차비도 안 내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적인 유시민이 불평을 할 정도의 사람이 노무현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강력한 친구, 옹호자, 우방이라고 해서 뭘 잘해주고, 돈이라도 찔러주고 입에 발린 말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가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보스나 윗사람이라기보다는 동료와 친구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정치가로서는 아니지만 조직의 보스로서 최고라고 평가한 김영삼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김영삼은 항상 그에게 돈 봉투를 찔러주었고 계보정치인들을 감동시키는 발언으로 충성심을 가지게 하는 언행을 했었다. 노무현은 그렇지 않다. 김영삼처럼 자기 것 챙기질 않으니 누구 뭐 줄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이 그를 지지하는 것조차 어찌 보면 그 사람의 일일 뿐이다. 판단은 각자 하는 것이다. 의견은 나누되 각자 생각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그게 가장 중요하다. 정치인으로서 그룹을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파벌을 만들고 작은 울타리 안에서 이익을 분배하고 서로 뒤봐주고 하는 일을 싫어했다. 그래서 대선후보시절 설렁탕도 안 사준다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후보이긴 하지만 그의 눈에는 후보는 후보의 일을 하면 되고 당원들은 당원들의 일을 하면 된다고 믿었을 것이다. 나를 당선시켜주시면 내가 당신 잘 봐주겠다는 태도가 실종되어 있다. 개인주의는 세상 만물이 원자로 이뤄져 있듯이 사회는 개인의 합이라는 견해와 이어져 있고 원자들이 당구공처럼 부딪히듯 사회는 자기 스스로 좋은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시각과 이어져 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이런 원리를 전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체 사회를 아우르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고 이는 전체주의가 된다. 이런 자유주의적 성향의 노무현을 다른 진보정치인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그가 이론을 배우기 전에 삶을 먼저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지독히 가난한 삶에서 성공한 변호사로 잘 나가는 삶까지를 패거리 없이 성장하면서 관찰하고 자기 나름의 균형감각을 터득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링컨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노무현은 내가 보기엔 가장 미국적인 가치를 잘 체득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모던한 사람이고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합리주의자이며 진정한 의미의 실용주의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국사회와 충돌한 것이다. 한국의 주류 기득권사회는 노무현과 정반대에 있다. 어디를 가건 여기저기 금을 죽죽 그어놓고 담합으로 이건 네 것 이건 내 것으로 갈라서 이익을 나눠 먹는데 익숙하며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공평하고 조화로운 세상이다. 물론 이런 담합이 모든 국민들의 담합일 때 그것이 사실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은 잊혀진다. 기업들이 담합할 때 소비자가 망각되고 정치가들이 담합할 때 유권자가 망각되고 기업과 권력이 담합할 때 국민들이 망각된다는 사실이 잊혀지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평등과 원칙고수를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검찰이 내가 왜 세상과 평등한가 라고 묻는다. 족벌언론이 왜 내가 세상과 평등한가라고 묻는다. 그렇기 때문에 30-40대의 한국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그를 지지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고 싶다고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빽으로 결정되고 원칙은 실종되고 알고 보면 다 인맥으로 해결되는 현실에서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주의자들인 것이다. 노무현의 개혁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노무현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 같은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김대중 같은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론으로 구축하고 그 이론을 축약해서 자신을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학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김대중처럼 장기간 투옥되는 기간도 없었던 그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기업들에게, 검찰에게, 시민들에게 그냥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평등과 자유가 넘치는 합리적 세상을 만들어 주면 그들이 모두 이해하고 좋아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마치 종교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교회당이나 절당에 들어가 무엄하게 거룩하신 장식물을 알지 못하고 모욕하는 것과 같은 일을 가져온다. 금세 저 사람은 일종의 ‘상도덕’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러 가지 패거리로 나뉘어 이권 나눠 먹는데 익숙한 세상에서는 패거리를 만들고 유지하는 사람이 파이의 큰 조각을 권력을 가지기 마련이다. 여기 온몸으로 우리 모두 합리적으로 독립적으로 개인주의적으로 살자고 하는 인간이 있다. 그의 존재는 패거리를 유지 조직하는 사람들에게 본능적 위협이 된다. 그들의 존재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설렁탕 파문으로 국민들의 비웃음을 산 사람들도 노무현에게 너만 잘나고 너만 깨끗하냐. 나를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말이지. 두고 보자.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글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결론을 내리고 마치기로 하겠다. 노무현의 비극은 첫째로 한국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들만의 작은 사회를 만들고 자기들만을 보는 시각을 가졌는가에 기인한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보다 평등한 시각을 들여오려고 하는 사람은 규칙을 깨고 예의가 없고 나를 모욕하며 나를 공격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이 문제는 사실 정도 문제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대부분의 국민은 아프리카의 누군가가 약이나 밥이 없어서 죽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며 아프리카의 누군가는 자신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 소득이 형편없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국적이라는 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적 기득권들도 선을 긋는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테두리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가도 관심이 없다. 한국 사회, 한국 공동체라는 개념은 여기서 실종되어 있다. 선을 전혀 긋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리할지 모른다. 한국 사회라는 것도 선이다. 그러나 어떤 선을 너무 당연시하고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그걸 전제하고 나면 노무현의 비극은 그와 그를 보좌하던 사람들이 개혁의 본질을 압축하고 그래서 국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철학으로 만들어 내지 못한 것에 크게 기인한다. 노무현도 그를 보좌하던 사람들도 알긴 알았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철학적 문제를 너무 간단히 생각했다. 왕조에 살던 국민들을 헌법만 고쳐서 공화국 선포한다고 갑자기 민주주의 하게 되는 것이 가능할까. 이 문제를 너무 간단히 생각하고 환경만 좀 바꿔주면 인간이 싹 바뀔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한 것 아닐까. 그렇게 해서 언론과 검찰과 재벌이 바뀌던가? 두 번째는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사실 반쪽짜리 엉터리라는 것이다. 미국은 잘사는 나라 중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나라다. 개인주의, 자유주의는 형이상학적, 신학적 토대 없이는 산산이 분열하는 유리건물이 된다. 노무현을 비롯한 지도층은 나름의 사회경험과 독서를 통해 진정한 실용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가치적 감수성을 획득했다고 해도 지지층은 논리와 개인주의, 자유주의밖에 없을 때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다. 합리적인 노무현을 따라왔는데 갑자기 자기모순적인 노무현을 만나고 자기를 속이는 노무현을 만난다고 느낀다.
노무현의 시간들을 이렇게 정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지면관계상 그리고 능력문제상 이 정도로 멈춰야겠다. 특히 노무현 이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패거리주의를 양산하는 문화와 어떻게 효율적으로 싸울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적 질문이다. 우리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바탕에 대한 고민이 핵심적 질문이다. 종교로 그걸 가능하게 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불교도 유교도 모두 혁명의 바탕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인간정신을 잊어버리고 그걸 사소하게 보면서 세상은 결코 크게 바뀌지 않는다. 노무현은 2009년 5월 23일 날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 아직 2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벌써 1년도 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노무현을 불러서 시대의 전면에 세운 것은 그 자신의 의지만은 아니다. 한국의 시민들이 저마다 책임의식을 느낄 때 온몸을 불살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로 가는 길, 국민통합의 길에 밑거름이 된 노무현의 희생 앞에 덜 부끄러워질 것이다.
격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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