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통령의 국민 얕보기 / 정병호 | |
사소한 것 같지만, 의미심장한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부산 실내사격장 화재로 숨진 일본인 관광객의 사망에 대해 국외 순방 중 하토야마 총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위로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인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줘야 한다”며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일인가”라고도 말했다 한다. 또 16일에는 하토야마 총리에게 별도 서한을 보내 “철저한 진상 조사와 재발 방지, 신속한 사고 수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으며 일본 측과도 긴밀히 협력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심심한 조의와 위로를 표한다”고 거듭 사과했다.
그런데 비슷한 유형의 국내 사건에 생각이 미치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사건 발생 후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제대로 된 장례는 고사하고, 유족들에 대한 보상마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농성을 함께 한 사람들만 엄벌에 처해졌다. 우리나라에 관광 온 손님이 화를 당했으니, 외교적인 차원에서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사과하고 위로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용산 철거민 유족들에게 진솔한 사과와 따뜻한 위로를 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이 갓 임명한 총리를 대신 보내 보상에 힘쓰겠다는 공수표를 전했을 뿐이다. 이번 사건에는 총리가 대신 사과해도 좋았고, 저번 사건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사과했어야 옳다.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는 것은 국정 수행과 관련이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산에서 일본 관광객이 사망한 것은 국정의 잘못과는 거리가 먼 반면, 용산 철거민 참사는 우리 국정의 총체적 난맥상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두 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반응을 비교하니, 문득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우리 국민은 과연 누굴 섬기라고 대통령을 뽑았을까? 국민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길 기대하고 대통령을 뽑은 걸까? 그러고 보니 대통령이 국민을 얕잡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선공약인 경부운하가 국민 대다수의 반대에 부닥쳤을 때도 그랬다. 국민이 반대하면 경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가, 여론이 좀 잠잠해진 듯하자 4대강 치수사업으로 둔갑시켜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지난 광우병 촛불시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론이 험악해지자, 짐짓 고뇌하는 듯 연출하며 쇠고기 수입 협정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결국은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쓸면 된다”는 그의 말대로 돼버렸다. 이미 법제화까지 된 행정중심복합도시에 대해서는 대선 전후에 걸쳐 수도 없이 약속했다. 이제 완전히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격이다. 공약(空約)을 믿고 표를 준 사람들만 바보가 된 꼴이다. 대통령 자신은 뒤로 빠지고 총리를 내세우는 모양도 볼썽사납다. 국민은 좀더 당당하고 떳떳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이 있다. 국격을 높여야 선진국이 된다는 것이다. 국민에 대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면서 어찌 국격을 논할 것인가. 또 대통령이 국격으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법질서 확립이다. 그런데 법이란 원래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완력으로 누르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 정권의 지상 목표가 선진국 진입이다. 그런데 구미 선진국 법질서의 모태인 로마의 12표법이 귀족의 부당한 압제로부터 힘없는 평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됐음을 아는가. 백성의 힘이 약하다고 무시하면 그게 어디 법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것인가. 누가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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