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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님을 추억하며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님을 추억하며
(블로그 ‘진실의 힘’ / 김창호 / 2010-12-08)


리영희 선생님! 대학을 들어가서 제일 먼저 읽은 책이 그분의 쓴 책이었다. 당시 ‘전환시대의 논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의도적으로 도발해 일어났다는 점을 사실적으로 밝힘으로써 대학생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과 냉전의식을 극복하는데 상당히 기여했던 책이다.

이 책을 들고 다니다 불심검문에 걸려 경찰서에 잡혀가거나 학교에서 유·무기정학, 심지어는 퇴학을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시절이 1970년대 말 유신 시절이었다. 1980년대는 광주항쟁을 거친 후 많은 사람들이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었고, 어려움을 함께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1970년대만큼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권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있었다.

반면 1970년대 말 우리 사회는 살벌했다. 데모에 참여하면 자칫 몇 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고 강의시간에 유신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수가 기관에 끌러나 고문을 당했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 대학생은 이렇게 리영희 선생님과 크고 작은 인연과 기억을 갖고 있다. 그분의 책을 읽고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가진 것은 물론 그분의 책을 소지하는 것 자체가 자그마한 실천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늘상 자신 때문에 고초를 겪은 우리에게 미안해하셨지만 우리로서는 그런 스승을 가진 것이 큰 행운이라 생각했다.


리영희 선생님의 도움으로 서울로 무사히 올라오다

대학 2학년이었던 1977년이었다. 농활을 마치고 필자는 한국현실에 대한 고민이 나름대로 적지 않았다. 이 현실을 피해 눈을 돌리자니 비겁하게 느껴졌고 그 현실에 도전하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마 8월 초순이었던가. 교수가 된 두 명의 대학친구와 동해안 도보여행을 떠났다. 강릉에서 걷기 시작해 약 1주일 여를 지나 경상도 지역을 들어섰다. 당시 동해안은 거의 철조망이 쳐져 있어 해안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도로 곳곳에 검문소가 있어 신분증과 짐 검사를 마쳐야 통과할 수 있었다. 요즘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엄청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었다.

울진을 벗어나 영덕 어디쯤을 지날 때였다. 검문을 하던 군인이 우리 세 사람을 불러세웠다. 학생증을 제시해 신분을 확인했음에도 가방을 뒤지려 했다. 1주일 동안 걸어 다니며 텐트를 치고 자고 했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친구 한 명이 그것을 거부했다.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것이 그들에게 더욱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총구를 들이대고 “손들어!” 하는 위협에 꼼짝없이 가방을 내놓았다. 친구가 그렇게 가방 내놓기를 주저했던 것은 가방 속에 다름 아닌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때문에 바로 포항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포항경찰서에서 관악경찰서로 연락해 우리의 신병을 이첩했다. 당시 지도교수가 관악경찰서에 호출돼(?) 몇 가지 신병과 관련된 확인서를 쓰고 석방되었다.

사실, 영덕 언저리에서 연행될 때 이미 우리는 돈이 떨어져 배고픔을 참고 있었다. 목표지 포항까지 도달한다고 해도 서울까지 갈 일이 막막했다. 그런 지점에 우리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그 책 덕분(?)에 우리 일행은 배고픔을 해결했던 것은 물론 무사히 서울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라 사실로 말했다

필자가 리영희 선생님께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의 힘’이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라 사실을 통해 그 진실을 보여주려 했다. 아마 기자생활에서 몸에 밴 사실 중심의 사고 때문인지 몰라도 어느 것 하나 말이나 논리로 때우려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철저하게 사실로 설명하려 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일으키고 개입했는지 공개된 미국 정부의 비밀문건과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설명했다. ‘우상과 이성’에서는 냉전과 반공의 도그마로 왜곡된 중국에 대한 인식을 이성적이고 사실적으로 바꾸려 했다.

특히 필자가 기억하는 한 편의 논문이 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으나 1980년대 중반 간행됐던 ‘사회와 사상’이라는 잡지에 쓴 글 한 편은 압권이었다. 당시 광주항쟁을 진압하고 집권한 군사정권은 여전히 북한의 위협을 강조해 군부체제 유지를 정당화했다. 그 핵심 논거가 다름 아닌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에 월등히 우월하다는 주장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이 논문을 통해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해 이미 남한이 북한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이 논문의 목적은 분명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과장되었고, 따라서 그 위협을 전제로 한 군부체제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외교·안보 전문가들, 왜 리영희 선생님을 능가할 수 없는가

그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군사독재 정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석할 때, 절대 평범한 정치분석이나 좌파이념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현실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사실에 입각해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했을 뿐이다. 결코 이론이나 사상적 틀에 짜맞춰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미국에서 유학한 수많은 외교·안보 전문가들과 크게 대비된다. 오히려 그들이 학습한 수많은 이론과 사상적 틀이 사실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에서 배운 이론과 방법론들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무기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에 집착해 사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지성, 좁게는 외교·안보분야에서 지식은 퇴행하고 있다. 우리의 주체적 이론과 방법론 없이 미국에서 수입한 틀로 우리 현실을 분석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와 도그마에 갇혀 있는 사실과 진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지식인과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여전히 리영희 선생님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기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어느 때부터 기자는 자판기를 두드리는 기능인 역할에 머물고 있으며 데스크의 지시에 꼼짝 못 하는 월급쟁이가 되어가고 있다. 기분 나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오늘날 기자들이 어떤 치열한 지적 노력과 사실과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저 이념과 정파만 난무한다는 게 언론학자들의 지적 아닌가.


그는 변방이었지만 항상 본질적으로 사고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변방이었다. 이북 출신이고 해양대를 졸업하고 군대에서 영관급을 지냈다. 그리고 통신사 기자를 했고 운이 좋아 한양대 교수를 지냈다. 물론 수차례 해직과 옥고를 치렀다. 서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법대를 나온 인물도 아니었다. 독일이나 미국의 저명한 대학에서 유학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사실의 힘’을 믿었다. ‘사실의 힘’ 외에 어떤 이론이나 학벌, 세력도 그에게는 힘이 될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와 도그마, 기득권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내놓은 갖가지 잡설을 격파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힘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입각해 진실을 밝히는 급진적 태도야말로 허구를 넘어서는 가장 핵심적 경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영희 선생님은 노무현 대통령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우리 사회의 변방 출신이었다. 그런 만큼 노무현 대통령은 현란한 이론이나 사상에 의존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실과 진실에만 호소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 강조했던 것은 “사실에 입각해 말하고 본질적으로 사고하라”라는 것이었다. 개혁과 진보는 ‘사실에 입각해 본질적으로 사고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종종 강조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우연히 뵙게 된 선생님은 병중에도 여전히 기상이 드높았다. 목소리도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느꼈던 그런 기백을 지닌 분이셨다. 선생님의 말씀 속에 비분강개가 녹아있었다.

“이놈들! 도저히 용서하면 안 돼! 자네들이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해!”

 

김창호 / 전 국정홍보처장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19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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