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MB, 외교사상 최악의 실패 되풀이"
"박근혜 사과, 참으로 고마웠다", "盧자살은 MB정권이 강요"
(뷰스앤뉴스 / 김동현 / 2010-07-29)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식 자서전이 6년만에 완성됐다.
김대중평화센터는 29일 동교동 사무실에서 <김대중 자서전> 언론설명회를 열고 주요 내용을 공개했다. 김 전 대통령의 '탄생에서 정치입문까지', 그후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퇴임 후 서거 직전까지'를 두권에 담은 이 책은 오는 8월10일 시판될 예정이다.
자서전에는 김 전 대통령의 숱한 비화와 생각이 담겨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특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
그는 이명박 정권 출범에 즈음해선 "이명박 당선인의 국정 운영이 걱정됐다. 과거 건설 회사에 재직할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정부 조직 개편안을 봐도 토건업식 밀어붙이기 기운이 농후했다. 통일부, 과기부, 정통부, 여성부 등이 폐지 및 축소되는 부처로 거론됐다"며 "내가 보기로는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 살릴 부처였다. 그 단견이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고 우려했다.
그는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선 핵 폐기 후 협력’이란 부시 대통령조차 폐기한 정책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햇볕 정책에 공감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고 대세에 역행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 내가 잘못 본 것 같았다"며 "나라와 국민을 위해 가장 보편적인 길을 찾는 것이 실용일진대, 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MB정권 1년후 쓴 글에서는 "그동안 너무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비핵 개방 3000’ 정책을 밀어붙였다....한국 외교 사상 가장 최악의 실패작을 다시 되풀이할 가능성이 컸다"며 "이 대통령은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다"고 질타했다.
김 전 대통령은 반면에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선 호의적 평가를 했다.
그는 지난 2004년 8월 박근혜 전 대표가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라고 사과한 일을 소개하면서 "뜻밖이었고 참으로 고마웠다"고 밝혔다. 그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1987년 '양김 단일화 실패'와 관련해선 "오랜 독재를 물리치고 16년만에 처음으로 치른 국민의 직접선거에서 졌다.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 "국민들에게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 잘못됐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해선 “내 어머니는 평생 작은댁으로 사셨다”며 자신의 친모인 고(故) 장수금 여사가 본처가 아니었고, 자신도 서자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나는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다.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지의 명예를 지켜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을 감춘다해서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고, 나 또한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공개 이유를 밝혔다.
|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29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자서전' 출판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다음은 김대중평화센터가 공개한 본문의 일부 내용.
1.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내 어머니
나는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서 일체 말하지 않았다.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다.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감춘다 해서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고, 나 또한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셨을 것이다.
― 1권 1부 <섬마을 소년> 27쪽
2. 죽음 직전에 예수님을 만나다 (1973년 납치 사건)
‘물속에서 쇳덩이를 벗길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바닷속이니 몇 분이면 모든 것이 끝날 거야. 고통도 사라지겠지. 그러면 내 고단한 삶도 끝이 날 거야. 어떤가, 이 정도 살았으면 된 것 아닌가.’
그러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다.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 상어에게 하반신을 뜯어 먹혀도 상반신만으로라도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팔목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양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나는 기도드릴 엄두도 못 내고 죽음 앞에 떨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옆에 서 계셨다. 아, 예수님! 성당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고, 표정도 그대로였다. 옷도 똑같았다. 나는 예수님의 긴 옷소매를 붙들었다.
“살려 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 주십시오.”
― 1권 4부 <예수님이 나타났다> 312~313쪽
3. 나를 죽이려 했던 박정희, 나를 찾아온 박근혜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그녀는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표였다. 2004년 8월 12일 김대중도서관에서 박 대표를 맞았다.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박 대표의 손을 잡았다.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 1권 4부 <궁정동의 총성> 385쪽
4. 야권 후보 단일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선거가 끝나자 국민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 민심은 흡사 폭격을 맞은 듯했다. 거리는 너무나 조용했고, 특히 민주 진영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닥치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어찌됐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많은 민주 인사들의 희생과 6?10 항쟁으로 어렵게 얻은 선거에서, 그것도 오랜 독재를 물리치고 16년 만에 처음으로 치른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졌다.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 물론 단일화했어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저들의 선거 부정을 당시로서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 잘못됐다.
― 1권 6부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지다> 536쪽
5. 내가 호남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내가 호남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 번도 고향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차별받는 호남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제대로 못해 늘 가슴이 아팠다. 그렇기에 호남인들과 고통을 나누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지역감정을 선동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나는 고향인 전라도를 찾는 데 많이 망설였고 가지 않았다. 가고 싶었지만, 진정 만나고 싶었지만 고향 땅을 일부러 밟지 않았다.
― 1권 6부 <지역감정과 편파 보도> 596~597쪽
6. “김 위원장, 일 처리 좀 시원하게 합시다.”
― 남북 정상 회담의 클라이맥스
그러자 김 위원장이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과거 7?4 공동 성명도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과 김영주, 이런 식으로 한 예가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대표해서 임동원, 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대표해서 김용순, 이렇게 합시다.”
“그때는 이후락 씨가 왔지만 지금은 대통령인 내가 직접 와서 정상 회담을 한 것입니다. 일 처리를 좀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임동원 원장이 거들었다.
“선언문의 서두에는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언제 평양에서 상봉하고 정상 회담을 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는 표현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 선언문의 말미에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로 표기하고 서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선언문은 우리 민족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기념비적인 문건입니다. 이것을 마련하신 두 분이 직접 서명하여 역사에 길이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이 얼마나 역사적이고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대통령이 전라도 태생이라 그런지 무척 집요하군요.”
갑자기 튀어나온 김 위원장의 농이었다. 절박한 분위기를 단번에 깨뜨렸다. 나도 다시 그에게 농담을 날렸다.
“김 위원장도 전라도 전주 김 씨 아니오. 그렇게 합의합시다.”
“아예 개선장군 칭호를 듣고 싶은 모양입니다.”
“개선장군 좀 시켜 주시면 어떻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덕 좀 봅시다.”
그러자 비로소 김 위원장이 웃었다. 정상 회담은 이렇게 종료되었다. 저녁 7시였다. 합의문은 ‘남북 공동 선언’으로 하기로 했다.
― 2권 3부 <현대사 100년, 최고의 날> 292~293쪽
7. 이명박 대통령,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명박 당선인의 국정 운영이 걱정됐다. 과거 건설 회사에 재직할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정부 조직 개편안을 봐도 토건업식 밀어붙이기 기운이 농후했다. 통일부, 과기부, 정통부, 여성부 등이 폐지 및 축소되는 부처로 거론됐다. 내가 보기로는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 살릴 부처였다. 그 단견이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선 핵 폐기 후 협력’이란 부시 대통령조차 폐기한 정책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햇볕 정책에 공감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고 대세에 역행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 내가 잘못 본 것 같았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가장 보편적인 길을 찾는 것이 실용일진대, 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았다.
― 2권 6부 <국민보다 반걸음 앞서 가야> 565쪽
이명박 정부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너무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비핵 개방 3000’ 정책을 밀어붙였다. …… 한국 외교 사상 가장 최악의 실패작을 다시 되풀이할 가능성이 컸다. …… 앞선 두 정부에서 이룩한 10년의 공든 탑이 무너지려는가. 그런 적대적인 정책으로 회귀하려면 통일부가 왜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 대통령은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다.
― 2권 6부 <그래도 영원한 것은 있다> 581~582쪽
8. 당신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소
2009년 새해가 밝았다.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었다.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그 험하고 절망적인 고난의 세월을 이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도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았다. …… 아내 없는 삶이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때는 아내와 같이 종일 같이 지낼 때가 있다. 그래도 기쁘고 즐겁다.
― 2권 6부 <그래도 영원한 것은 있다> 580~581쪽
9. 이원집정부제나 내각 책임제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오랫동안 대통령 중심제를 지지해 왔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국민과 함께 직선 대통령제를 쟁취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정?부통령제였다. 우리나라에도 부통령이 있어야 한다. …… 대통령에 집중된 의전 부담도 줄일 수 있고, 대통령 유고시에 국정 중단을 막을 수도 있다. 이렇듯 권력 상층부가 서로를 인정하면 망국적 이념 공세나 지역감정을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 지금도 정?부통령제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대통령제 하에서 10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이 비극적 종말을 맞았지만 그 후로도 독재자나 그 아류들이 출현했다. 이를 막기 위해 이제는 대통령 중심제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5년 단임제는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이제 민의를 따르지 않는 독재자는 민의로 퇴출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이원 집정부제나 내각 책임제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 2권 6부 <그래도 영원한 것은 있다> 586~587쪽
10. 노무현 대통령, 비로소 그의 영전에 조사를 바친다
노 대통령은 고향 앞산에서 몸을 날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하루하루가 너무 가혹했을 것이다. 검찰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노 대통령의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을 마치 소탕 작전을 하듯 조사했다. 매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수사 기밀을 발표하며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 처리에 대해서도 여러 설을 퍼뜨렸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 장례위원회 측에서 내게 조사(弔辭)를 부탁했다. 나는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반대한다고 다시 알려 왔다. 내가 준비한 조사는 결국 읽지 못했다. 이제 비로소 그의 영전에 조사를 바친다.
― 2권 6부 <그래도 영원한 것은 있다> 591쪽 |
출처 : http://www.viewsnnews.com/article/print.jsp?seq=65801
김동현 기자 / 뷰스앤뉴스
※ 본 글에는 함께 생각해보고싶은 내용을 참고삼아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언론, 학문' 활동의 자유는 헌법 21조와 22조로 보장되고 있으며, '언론, 학문, 토론' 등 공익적 목적에 적합한 공연과 자료활용은 저작권법상으로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188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