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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진보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진보였다”
(위클리경향 / 유시민 / 2009-12-24)


ㆍ유시민 전 장관, 두 전직 대통령을 비판한 진보세력에 섭섭함 토로

"기나긴 한 해였습니다. (감회가 깊은 듯 잠시 멈췄다가)굉장히 길게 느껴지네요. 정치적으로 보면 아버지, 큰아버지가 다 돌아가신 셈이 됐지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50)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해 총선에서 낙선한 그는 그 뒤 여름 무렵부터 자신의 '생업'인 글을 쓰고 강연하는 일을 재개했다. 돌아온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며 < 후불제 민주주의 > (돌베개·3월)와 < 청춘의 독서 > (웅진지식하우스·11월) 등 두 권의 책을 냈다. 두 책은 각각 8만 권과 6만 권이라는, 요즘 출판시장에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20년 동안 누적된 그의 열혈독자인 '유빠'(출판계는 2만 5,000명으로 추산한다) 이외에도 그의 생각이 궁금하던 독자도 많았던 것 같다.

지난 12월 15일 만난 그는 '한명숙 정치공작분쇄 공동대책위'에서 여는 명동 집회에 가는 길이었다. 그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검찰이 생짜로 사건을 꾸며낼 수 있다는 걸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내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에 맞춰 고인의 전기를 집필하고 있는 그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 진보 진영에 남긴 내상이 너무 깊어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용산참사에서 시작해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 노조 탄압으로 이어진 우울한 1년이었습니다. < 후불제 민주주의 > 에서 '민주주의의 역주행'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민주주의라는 게 영원한 학습 과정입니다. 민주주의를 운용하면서 비용을 지불해야 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경우 민주주의가 시민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양식 속에 안착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이른 시간 안에 멀리 되돌아가는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민주주의의 효율성, 중요성에 대해서는 국민 각자가 생각해 보는 시간이라고 보구요. 이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어느 시점에선가 반전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되도록 비용을 덜 치르는 게 좋은데…. 그런 게 사회의 역량이고 정치 지도자들의 역량 아닐까요."

◈ 참여정부를 비판한 진보 진영에 대해 서운함이 있는 듯한데요. 참여정부의 각료로서, 지식인으로서 노무현 정권을 평가한다면요.

"정권이 끝난 지 만 2년이 지났기 때문에 평가는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칭 진보라는 분들, 김대중과 노무현은 진보가 아니라는 분들과 달리 저는 김대중·노무현이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E H 카를 인용한다면 '인간 능력이 계속 발전한다는 것을 믿고 불합리한 제도와 낡은 관념에서 오는 억압을 극복해 나가면서 사람이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제도와 문화양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진보라고 봅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토대로 들어선 두 정부를 진보정치 세력은 자기의 성취로 생각해야 마땅하고, 이런 전제에서 자유·평등·정의를 실현하는 쪽으로 분화해 나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두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로 규정하고 적대시했어요. 그 결과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명박은 노무현이다, 다 똑같은 신자유주의 정권이다.' 과연 그럴까요. 현실과 괴리된 자기만의 관념의 왕국을 구축해 놓고 거기 들어올 수 없는 걸 신자유주의니 보수라고 비판하는 게 논리적으로 합당한지, 정치적으로 현명한지 묻게 됩니다."

◈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야당이 국민들에게 이렇다 할 의제와 희망을 던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 후불제 민주주의 > 에서 헌법을 탐구한 데에는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희망과 대안이 안 보이느냐는 것은 국민의 마음속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공화국에서 다수의 국민이 소망을 품으면 어떤 식으로든 이뤄집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는 경제살리기, 부자 되는 것에 민심이 쏠렸습니다. 다른 가치들이 이뤄졌다고 보거나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과연 어떤 소망을 품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지, 이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공화국 시민으로서 우리의 권리는 무엇인지,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자유·정의·공정·평등·평화·환경 등 이런 가치들이 모두 헌법에 나와 있고, 그 가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지식인과 정치인 및 정당의 임무라고 봅니다."

◈ 문제는 진보의 역할인데,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으로 봅니까.

"저도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촛불시위를 보면 각성한 시민, 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알고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많지는 않습니다. 또 충분치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음에도 그들의 소망과 힘을 묶어서 현실의 힘으로 전환시켜 내지 못합니다. 이명박 정부의 굳건한 지지층이 35%입니다. 나머지 3분의 2는 역사를 되돌리는 정권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현상이 상당 기간 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지식인사회·시민사회·정당이 공통의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자기주장이 다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는 의식을 갖고 각자 상이한 소망 사이의 타협을 이루는 기술을 학습해 나가야겠지요."

◈ 1년에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이 어떠했습니까.

"파주출판단지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 놓고 노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 두 달 동안 중단한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작업했습니다. 아침에 나가서 글을 쓰고 저녁에 집에 오고, 글이 안되면 놀러 가고. 작은 공동체 안의 안온한 삶이지요."

◈ < 후불제 민주주의 > 에 비해 < 청춘의 독서 > 에는 개인사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독서와 운동이 결합된 삶은 젊은 독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줄 텐데요. 젊은 세대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그런 건 별로 없지요. 기성세대가 청년들한테 이야기해 봤자 듣지도 않고, 필요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합니다. 지금 청년들은 자기들이 봉착해 있는 삶의 환경이 있고, 그 안에서 자기 일을 찾아 나가는 것이니까요. 한 세대 차이인데 '그때는 이런 환경에서 이렇게 이렇게 살았다'라고 그냥 참고하는 정도면 좋겠지요."

◈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책을 한 권만 꼽는다면 어떤 것입니까.

"E H 카의 < 역사란 무엇인가 > 입니다. 스무 살 때 처음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고, 앞으로도 읽어야 할 책이에요. 형식상 역사이론서이지만 탁월하고 정교한 논리적 연쇄가 미학적 즐거움까지 주는 책입니다. 역사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사회는 뭐고 정의는 뭐며 진보는 어떤 의미인가를 종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단초를 담고 있지요. 자신의 삶을 사회라는 그물망, 그 그물망이 변천해 온 흐름 속에 놓고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 < 청춘의 독서 >를 쓰는 도중에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한 대목이 나옵니다. '피의자'를 사회적 죽음으로 몰아가는 언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요.

"언론자유는 고귀한 관념인데 인간세상에 들어오면 어떤 고귀한 관념도 유지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언론자유가 권력, 그것도 사회적 권력이 아니라 사적인 권력이 되어 물질적 이익, 상상의 이익, 그리고 그들 나름의 애국적 열정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지요. 특히 그들의 애국적 열정이 많은 사람들의 소망에 역행할 때 언론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건 조·중·동이라고 일컬어지는 보수언론뿐만 아니라 진보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이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데 나는 언론활동에 영향을 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분노를 넘어 두려움을 느끼지요. 언론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 노 전 대통령의 전기를 집필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노무현재단의 의뢰를 받아서 서거 1주기인 내년 5월까지 낼 겁니다. 그의 생애를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 없어요."

◈ 노 전 대통령은 어떤 분입니까.

"자꾸 생각이 달라져요. 처음에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 점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에요. 비굴한 삶을 단호히 거부한 사람, 다시 말해 늘 당당한 선택을 하고자 노력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한 분이에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기록을 검토하다 보니 환갑이 지난 최고권력자였던 자의 삶과 죽음이 아니라 꿈 많은 소년의 삶과 죽음을 다룬다는 느낌이 듭니다. 주관적인 자기기록을 많이 남겼는데요. 이것도 잘한 것은 없고 잘 못한 부분은 많아요. 노무현을 이해하려면 김대중을 이해해야 할 것 같고요. 김대중이 큰 산맥이라면 노무현은 그 산맥 위에서 높이 솟은 봉우리라고 할까요. 누가 훌륭하다는 게 아니라 존재감, 성격이 다르지요."

◈ 지난 11월 국민참여당에 입당했습니다. 앞으로 국민참여당이 어떤 위상과 역할을 할 것으로 봅니까.

"국민참여당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게 좋지 않은 듯합니다. 저는 당헌상의 용어로는 회비를 꼬박꼬박 내는 주권당원, '문필업에 종사하고 정치 경력이 있는 평당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니까요. 친노 세력이 약 15만 명이라고 보는데 아직 당원은 2만 명 남짓합니다. 친노에 속하는 분들 역시 아직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 새해에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습니다.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후보로 오르내리는데 현재 입장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복잡한 문제이니 당에서 논의해 봐야겠지요. 어디에 출마하겠다 아니면 절대 못하겠다 이런 건 아니고 (출마가) 필요한 건지, 왜 필요한 건지 당에 계신 분들과 상의한 다음에 역할이 주어지면 그때 봐서 해야겠지요. 내가 이걸 해야겠다, 하고 싶다고 내세울 만한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 글 : 한윤정 기자, 사진 : 김석구 기자 >


출처 :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091224102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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