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면회 온 가족들 앞에서는 늘 웃었지만 그 웃음은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웃음이었음을 문성근은 깨달았다. 문성근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결코 앞에 나서서 운동을 주도할 만한 분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굉장히 섬세했고 어떨 때는 신경질적일 정도로 여린 면이 있었다. 문익환은 목사 이전에 글을 좋아하는 시인이었고 구약을 알기 쉬운 한국어로 풀어서 옮긴 명번역가였다. 문익환이 남들은 은퇴하여 적당히 원로 대접을 받을 59세의 나이로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한 혐의로 처음 투옥된 뒤로 199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뜰 때까지 18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12년 3개월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 것은 역사의 책무를 뿌리칠 수가 없어서였다. 문익환에게 역사의 책무를 가르쳐준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1899년 2월 칼바람을 맞으며 네 살의 어린 나이로 가족과 함께 간도로 이주한 문재린은 1919년 3월 중순 조선인들의 만세 행진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옥살이를 했고 나중에 캐나다 유학까지 다녀와서 목사가 되었다. 해방 뒤에는 한국에서 당시로써는 드물었던 유학파 엘리트 목사의 신분이면서도 기득권을 버리고 평신도 운동을 벌이면서 한빛교회를 세워 개혁 운동의 구심점으로 키웠다. 어머니 김신묵은 익환, 동환 형제들이 어릴 때부터 이순신, 을지문덕, 홍범도 장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라를 잃은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과 책임감을 키워주었다. 아이들 베개에다가는 태극기를 수놓아주었다. 문익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치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들이 둥글둥글하게 안전한 길로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문익환의 부모는 달랐다. 문익환이 장성하여 가정을 꾸린 다음에도 신앙인으로서 남다른 책임감을 강조했다. 문익환이 환갑을 코앞에 두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것은 비명에 죽은 친구 장준하가 못다 이루고 간 꿈을 떠맡는다는 뜻도 있었지만 만주 명동촌에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기독교인의 역사적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뜻도 있었다. 문익환은 병약했지만 그의 집안은 장수 집안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구순을 넘겼고 동생 문동환도 1921년생이니 구순을 넘겼다. 만년의 18년 중에서 3분의 2가 넘는 기간을 차가운 교도소에서 지내면서 몸과 마음을 상하지만 않았다면 훨씬 오래 살았을 것이다. 문익환도 사람이기에 겨울이면 얼음장 같은 교도소 독방에서 떨면서 따뜻한 가족의 품이 그리웠을 것이다. 손자 손녀의 재롱도 보고 싶었을 것이다.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익환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부모가 일깨워준 역사적 책무가 있었다. 부모님이 못다 이룬 통일의 꿈, 대를 이어 이루어야 할 통일의 꿈이 있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야권의 단결 없이는 필패라는 절박감으로 지난가을부터 야당에 결집의 압박을 가하는 국민 서명 운동 백만민란 운동을 벌여온 문익환 목사의 막내아들 문성근은 올해 1월 2일 마석 모란 공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절을 하고 나서 아버지의 묘소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애써 울음을 참다가 결국 눈물을 훔쳤다. 지난 연말로 목표했던 5만 명은 넘겼지만 문성근은 좋아하던 영화도 미루어두고 삭풍이 몰아치는 거리에서 열띤 호응 못지않게 사람들의 적잖은 무관심과 냉대를 받으면서 많이 지치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지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으니 더욱 고독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도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많이 지쳤을지를 새삼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문성근은 아버지 묘소에서 종이에다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 못난 놈, 자꾸 지칩니다.” 그렇지만 다짐했다.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저 할 수 있는 만큼, 하겠습니다. 2012년, 민주진보 정부, 수립해서, 통일의 그날을, 앞당겨야죠.” 얼마 전 홍익대학교에서 해고당한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농성장에 홍익대 학생회장이 나타나 학업에 방해가 된다며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자기 학교가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것처럼 기업에 찍혀서 취업 시장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이라는 글을 게시판에 올린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죄가 없다. 자식을 두렵게 키운 부모의 잘못이다. 부모에게도 죄가 없다. 부모를 그런 두려움으로 몰아간 살벌한 사회의 잘못이다. 이런 대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한 무리의 앳된 초등학생들은 빵을 들고 농성장을 찾아 청소부 아주머니들을 위로했다. 그 어린이들을 그렇게 키운 것도 역시 부모다. 한국의 앞날이 어둡지 않은 이유다. 부모가 흔들리면 자식도 언젠가는 흔들리고 부모가 안 흔들리면 자식도 안 흔들린다. 김문수와 이재오의 변절 뒤에는 아마도 두려움에 떨던 부모의 입을 통해서 어릴 때부터 머리에 주입된 두려움이 있었으리라. 문익환이 1976년 살인적인 유신 체제에 맞서 정권 타도를 외치며 구국선언을 주도한 것은 59세 때였다. 영화배우를 접고 한나라당 타도를 위한 유권자 결집 운동의 총대를 외롭게 맨 문성근도 올해 59세다. 문성근은 외로워도 흔들림 없이 갈 것이다. 외로웠어도 흔들리지 않고 갔던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갈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없는 평범한 우리도 흔들림 없이 갈 것이다. 외로웠어도 흔들림 없이 가면서 역사에 몸을 던진 마음의 아버지가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문성근은 끝까지 갈 것이다. 우리도 끝까지 갈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들의 이름으로.
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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