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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MBC 엄기영 사퇴의 본질은 이것이다

MBC 엄기영 사퇴의 본질은 이것이다
(딴지일보 / 화성 / 2010-02-09
)

사퇴의사를 밝히고 비통한 표정으로 나오는 엄기영 사장

'송국 잠그고 상 떠는 집단'(이하 방문진)의 광기가 극에 달했다. 사실상 지방선거가 시작된 마당에 MBC를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어차피 욕먹을 거 하루라도 빨리 먹는 편이 낫겠다는 무식한 용기의 발로인지, 이번엔 아예 방송국 문도 잠그지 않고 국민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칼을 휘둘렀다.

법에 정해진 방문진의 설립 목적(방송사의 공적 책임 실현, 민주적이며 공정한 방송문화의 진흥)은 망각한 채 줄곧 방송사 접수에만 눈독을 들이던 그들이 엄기영 사장을 압박해 결국은 스스로 물러나게 만든 것이다.

'네가 이래도 버틸 수 있겠어? 어때 쪽팔리지? 쪽팔리면 그만두던가….' 차라리 그냥 너 나가, 라며 해임을 했더라면 그래도 좀 덜했을 것을, 이건 36년 동안 한조직에 몸담았던 한 사람의 인격에 대한 침 뱉기이자 이를 바라보는 전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그 어떤 막장 드라마가 이보다 더 치졸하고 역겨울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막가자는 거다.

엄기영 사장은 어제(8일) 남긴 고별사에서 '후배들에게 무거운 짐만 넘기고 떠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울 따름' 이라며 '공영방송 MBC를 계속 지켜달라는 것이 물러가는 선배의 염치없는 부탁'이라고 했다. 사장으로서의 엄기영이 아닌 MBC 선배로서의 사과와 당부를 한 것이다.

이에 반해 방문진 김우룡 이사장은(김 이사장 역시 MBC PD 출신으로 엄기영 사장보다는 8년 선배다)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 어떻게 발전이 있겠나.'라며 자신이 저지른 짓을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의 그것'과 비교하는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보였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껍질이 깨지는 아픔'이라 함은 아마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리라.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이명박 가카다.

아마도 자신이 아직도 성장의 고통을 느끼며 방황하는 '소년 싱클레어'라도 된듯한 착각에 빠졌던 듯한데, 착각도 이쯤 되면 거의 치매 수준이다.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신, 즉 '아프락사스'는 빛과 어둠의 세계, 선과 악을 모두 다스리는 신이지만 김 이사장이 숭배하는 '가카신'은 어둠의 세계만을 지배하는 악의 신이라는 사실을 그는 정녕 몰랐던 것일까.

선배로서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후배의 목을 자르고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을 짓뭉개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대가로 그는 더 크고 좋은 자리를 기대하며 가카를 향해 날아가겠지만, 과연 가카신께서는 그런 그를 앞으로도 어여삐 보살펴 주실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올시다'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했던가. 토끼를 잡은 사냥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뜨거운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일 뿐이다. 왜 그러냐고?

KBS를 접수할 때처럼 그렇게 조용히 넘어간다면 좋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MBC는 그리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당장 MBC 노조가 총파업 결의를 위한 찬반투표를 실시하기로 했고, 여러 시민단체들도 이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무엇보다 MBC만은 지켜내야 한다는 국민들의 절박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엄기영 사장은 정연주 사장을 몰아낼 때 그랬던 것처럼 '좌파' 나 '코드' 인사라는 딱지를 쉽게 붙일 수 있는 인물도 아니다. 그간의 행보로 봤을 때 그는 철저하리만치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애쓴 인물이었기에(오히려 우파에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좌·우와 진보, 보수를 떠나 누가 보더라도 방송 장악을 위한 음모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수족이 잘리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조직을 지키고자 했었던 작년 12월의 과거까지 더해져 이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국민들의 동정론까지 힘을 얻고 있다.

당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가카의 입장에서는 누군가 총대를 멜 희생양이 필요한 이유고, 토끼 잡은 개를 삶아야 하는 이유다. 자 과연 누구를 개로 몰아서 삶을 것인가. 가카의 수족인 이동관을? 최시중을? 물론 그들이라 해서 삶지 못할 가카는 아니다. 필요하다면 수족이 아니라 머리라도 삶아 드실 분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들에겐 아직도 잡아야 할 토끼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거 아니겠나.

여론의 추이를 봐 가면서 적당한 시기가 되면 정치적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서, 지방선거에서 단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김 이사장을 가마솥에 넣고, 끓는 여론을 잠재우려 들 것이다. 바로 김우룡 이사장의 해임이다.

사냥개는 모른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최근 방문진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이를 위한 사전 포석이라 볼 수 있다. 친가카계 인사로 방문진 이사가 교체된 지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이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엄기영 사장을 자른 것 외엔 아무것도 없을진대 뜬금없이 무엇을 감사하겠다는 것이겠나. 당연히 사냥개 잡을 명분을 찾고 있음이다.

물론, 사전에 정해진 각본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 드라마의 결말까지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MBC 노조와 국민들의 저항이 약하다는 판단이 들 경우엔 언제든지 입맛대로 바꿔버릴 수 있는 것이 막장 드라마의 최대 장점일 테니까. 김 이사장이 지금 절실히 바라고 있을 해피엔딩으로….

따라서, 이번 사태에 대한 공격의 화살을 방문진에게만 집중해선 안 된다. 방문진은 언제라도 자를 수 있는 도마뱀의 꼬리에 불과한, 한마디로 버리는 패이기 때문이다. 도마뱀의 머리를 직접 겨눌 수 없다면 최소한 수족이라도 겨눠야 하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가카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최시중 방통위원장이야말로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삶아야 할' 적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1심에서 무효판결이 난 KBS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주도한 전력도 있고, 무엇보다 언론 장악을 위한 모든 꼼수들을 가카 뒤에서 기획하고 조종하는 배후세력의 수장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언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 그들의 수장을 호락호락 국민 앞에 내어놓을 리 만무하다. 방송사 진출에 사활을 건 조중동련 같은 찌라시 언론들은 모든 총력을 기울여서 업무 방해니 불법 파업이니 하는 구실을 내세워 MBC 노조 죽이기에 앞장서며 최 위원장 구하기에 나설 것이고(중앙일보 9일 자 사설; 'MBC는 여전히 환골탈태 필요하다'), '어버이연합' 같은 보수를 가장한 수구꼴통 세력들도 컵라면과 날계란을 들고 설쳐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PD수첩'이나 '후 플러스' 같은 시사프로그램은 봄이 오기도 전에 '봄 개편'에 걸려 사라지게 되고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김미화 씨도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도 다시는 방송에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군대의 정훈교육 시간처럼 오로지 가카에 의한 가카만을 위한 방송을 시청료까지 내면서 봐야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정말이지 끔찍하고 역겨운 일이지 않은가. 차라리 TV를 박살 내고 말지….

그렇기에 정작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감내하고서라도 알을 깨고 나와야 할 사람은 김우룡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그동안 우리는 껍질이라는 단단한 보호막 안에서 알로서 살기를 강요당해 왔는지도 모른다.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살도록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깨고 나오면 새가 되고, 저들에 의해 깨진다면 후라이가 될 것이다.

'나 하나쯤은' 하는 안일한 세계를, '내가 나선다고 뭐가 바뀌겠어.'라는 비관론적 세계를 과감히 파괴할 수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에 새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신에게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니, 그 신의 이름은 부끄럽게도, 슬프게도 그 옛날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고 또 불렀던 그 자유와 민주주의다.

더 이상의 말이 무의미해짐을, 더 이상 컴퓨터 앞의 분노가 부질없는 짓임을 느낀다. 이 땅에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음이 견디기 힘든 굴욕이고 모욕임을 깨닫는다.

다시금 촛불을 들자.

촛불이 어렵다면 성냥불이라도, 그 성냥불마저도 힘들다면 너와 나의 이마를 맞댄 부싯돌로 우리들 양심에 남아있는 심지에 불을 붙여보자. 꺼질 수도, 꺼져서도 안 되는 희망의 불씨를.

 

딴지정치부 화성


출처 : http://www.ddanzi.com/news/95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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