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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 하는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 하는가?
(서울대 경제학부 / 이준구 / 2010-03-10)


1987년 4월 내가 평소에 믿고 따르던 선배 교수 한 분이 나를 찾아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서울대학교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곧 발표될 예정인데 거기에 참여할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미 다른 대학 교수들이 그와 같은 성격의 시국선언을 발표한 터라, 언젠가는 서울대학교 교수들도 그 뒤를 따를 것이 분명했다. 다만, 시국선언의 발표 시점이 언제인지만이 문제 될 따름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워낙 겁이 많은지라 학교 다닐 때 데모 한 번 제대로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민주화를 위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무릅쓰고 학생운동에 헌신하는 동료들을 보면 존경의 마음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때는 내가 어린 학생이라는 구실이 있었기에 그 부담을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성장해 어른이 된 시점에서 그런 구실을 찾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민주화가 절박한 과제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교수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시국선언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5공의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보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시의 나는 귀국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조교수로 재임용을 눈앞에 두고 있던 터였다. 부끄럽지만 그때의 내 진심을 말하자면, 시국선언에 참여하라는 권고를 아예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일단 그 권고를 받은 상황에서 나는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얄팍한 생각으로, 참여는 하지만 가능한 한 외부에 알려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나 교수 대표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하자마자 모든 일간지가 대서특필해 그 일을 보도했다. 그때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 수는 40여 명으로 1천 명이 넘는 서울대학교 교수 중 극소수에 불과했다. 극소수의 교수들이 일으킨 작은 사건으로 치부해 무시해 버리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비중 있게 다룬 것이다.

되돌아보면 그때는 우리 언론이 나름대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권위주의적 통치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정부는 언론이 교수들의 시국선언 관련 보도를 자제해 주기를 바랐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국선언을 비중 있게 다뤄준 것은 나름대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바로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이 6월 항쟁의 불꽃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지난 3월 8일 천주교단 4명의 주교를 포함한 사제 1,104명이 정부의 4대강 사업의 중단을 촉구하는 사제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제 우리가 강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사제선언문에서 그들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음에도 거침없이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자 젖줄인 4대강을 파헤치는 죄에 무심했던 사제들의 죄를 고백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서 죄의 굴레를 끊기 위해 전국 사제들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고 시국선언을 하게 된 심경을 토로했다.

▲ 천주교 사제들과 농민들이 8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 계단에서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 주최로 열린 '4대강 사업 반대 전국 사제 선언' 기자회견에 참석해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4대강 죽이기 사업’의 즉각적 중단을 촉구하는 이 선언문에서 우리는 사회를 향해 입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 사제들의 절박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다고 느꼈으면 거리로 뛰어나와 선언문을 읽을 수밖에 없었을까? 티 없이 깨끗한 종교인들의 영혼에서 우러난 부르짖음에 단 한 점의 사심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 어떤 정치적인 배경이 있으리라고는 더욱더 생각하기 어렵다.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양심의 소리가 특히 진한 감동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사제선언과 관련해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기사는 극소수의 언론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대다수의 언론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 천주교단 사제의 1/4이 넘는 숫자가 참여한 사제선언문이 발표된 전례는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전대미문의 사건이 전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아마도 현 정부에 불리한 기사가 될 것임을 우려해 알아서 싣지 않기로 결정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것 말고는 다른 그럴듯한 이유를 단 하나라도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이런 언론의 행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현 정부 들어오면서 언론이 권력 앞에서 ‘알아서 기는’ 행태가 눈에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도대체 1987년 봄의 기백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최대의 논란 대상이 되고 있는 세종시 문제는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정부 부처 일부를 그곳으로 옮기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듯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에는 상당히 과장된 주장인 것 같다. 우리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원안과 수정안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작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의 문제는 우리 전 국토의 생태계가 걸려 있는 심각한 문제다.

이런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연일 세종시 문제로 지면을 꽉꽉 채우는 언론의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대강 문제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대립구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 국토의 생태계가 죽어간다는데 보수라고 박수를 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보수언론을 자처하는 신문들은 하나같이 4대강 사업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도대체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제기된 문제점이 하나, 둘이 아닌데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는 듯 마치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언론에 바라는 바가 4대강 사업에 딴죽을 걸어달라는 것은 아니다. 언론사 자신의 판단에 따라 4대강 사업에 반대하려면 반대하고 찬성하려면 찬성해도 무방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일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기사화해 독자들에게 논점이 무엇인지를 알려야 하는 것이 언론의 정도(正道)다.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여 바람직한 해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감히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믿는다.

주교들까지 포함된 천주교 사제들의 집단행동이 흔히 볼 수 있는 사소한 사건은 결코 아니다. 이번의 사제선언은 극소수 젊은 사제들의 돌출행위가 아니라, 천주교단 전반의 생각이 반영된 집단적 행동이다. 최근 천주교단과 관련해 일어났던 사건 중 이것처럼 중요한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렇다면, 보수를 표방하든 진보를 표방하든 정도를 걷는 언론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기사화해 독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이런 의무를 게을리 한 일부 언론이 도대체 어떤 구실을 찾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일부 언론이 결성한 침묵의 카르텔은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논란 그 자체의 은폐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언론의 도움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진실은 언제든 반드시 밝혀지게 되어 있다. 지금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전문가들이 우려하고 있는 문제들이 현실화된다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4대강 사업이 만들어낸 해독의 수많은 피해자들이 증인이 되어 그 진실을 낱낱이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4대강 사업과 관련해 늘 역사적 심판을 강조해 왔다. 우려했던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었던 사업으로 판명되면 이 사업의 강행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들뿐 아니라, 침묵의 카르텔을 결정해 문제점의 은폐를 시도한 일부 언론들도 함께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져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중요한 시기에 언론이 과연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후일의 역사가들이 냉철하게 평가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준구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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